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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리뷰/일반도서

[유대인 소설/고전소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by boo_ke 2023. 7. 10.

기본 정보

제목 :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저자 : 임레 케르테스
출판 : 민음사(2022. 1. 1.)
장르 : 소설

세부 정보

1. 저자

1929년 부다페스트에서 목재상을 하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박해에 의해 열네 살의 나이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악명 높은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를 거쳐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부다페스트로 돌아온다. 일간지 편집인, 공장 노동자, 프리랜서 작가, 번역자로 일하면서 니체,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등 많은 철학가와 작가의 작품을 독일어에서 헝가리어로 번역, 소개했으며 1973년에는 13년간의 집필 기간을 걸친 첫 소설 『운명』을 탈고한다.

이후 의미상 속편에 해당하는『좌절』,『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등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끈질기게 탐구했다. 소로스 재단상, 라이프치히 문학상, 헤르더 상에 이어 20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이듬해『청산』으로 ‘운명 4부작’을 완성한다. 

2. 책 세부정보

임레 케르테스의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인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1번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이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번, 360번으로 각각 출간된 『운명』과 『좌절』에 이은 이른바 ‘운명 4부작’의 세 번째 작품이다.

 

십삼 년에 걸쳐 쓴 첫 소설 『운명』에 나치 절멸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에 대한 끔찍한 기억에 시달리며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십 대 소년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케르테스는 이 책에서 노년에 접어든 작가이자 문학 번역가로 다시 등장한다. 『운명』이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에 대한 기억을 담은 책이라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의 삶에 관한 이야기, 『운명』에 대한 응답과 같은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운명 4부작’ 중 자전적 성격이 가장 짙은 작품이다. 고통스러운 아우슈비츠 체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첫 소설 『운명』과 『운명』을 출간하기까지 문단의 무관심과 생활고에 시달리며 겪은 좌절과 문학에 대한 희망을 그려 낸 『좌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도 케르테스는 비극적 세계에서 처절하게 영혼을 짓밟힌 인간의 존엄과 개인이 짊어지고 극복해 가야 할 운명에 대한 문학적 성찰을 보여 준다. 

 

감상

저자는 14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거친 후 살아 돌아왔다. 앞에서 썼듯, 수용소에서의 이야기는 13년에 걸쳐 『운명』이라는 작품으로 풀어냈고, 본 책에는 그 이후의 삶을 살아내는 것 자체를 독백 형식으로 그린 책이다.

 

"아니오!" 라고 시작되는 도입부가 매우 인상적인데, 과연 무엇이 안 된다는 걸까?

아우슈비츠에서의 끔찍한 경험이 한 명의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책장을 넘길수록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진다. 저자가 부르짖었던 "아니오!"는 아내가 저자에게 아이를 갖자고 얘기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나왔던 본능 때문에 외친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즉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본능적으로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본능에 반하여 작동하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의 반(反) 본능이 우리의 본능을 대신하고, 더욱이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 이미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문구를 본문에서 여러 번 사용한다. 즉 자연스러운 본능이란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경험을 했고, 그렇기에 그에 반하는 본능이 자신의 본능을 대신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졌다고 나는 해석했다. 따라서 본능적으로 반본능이 본능을 대신해 결국 "아니오!"라는 절규를 하게 된 것이다.

 

그 까닭은 아우슈비츠에서의 트라우마에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될 아이의 삶이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절규에 가까운 "아니오"로 인해 그는 아내와 이혼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부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닌 일종의 강박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얇은 책이지만 내용도 어려웠고, 물리적인 가독성도 떨어지는 편이다. 원본의 느낌을 해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한 개인의 불합리한 경험,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하나의 인생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책 속 문장

내가 소속된 집단을 굳이 명명하지 않더라도, 결국 그 사실로 나의 처지는 매우 훌륭하게 정의되었다,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내게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유대인이라는 생각, 나는 마침내 이 생각과 평화를 맺은 것이다.
과학은 그녀의 병 앞에서 근본적으로 무기력했다, 과학이 이 질병을 일으킨 원인, 즉 아우슈비츠 앞에서 무기력했듯이:
나의 아내의 어머니의 질병은 말하자면 아우슈비츠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우슈비츠로부터는 치유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아우슈비츠라는 질병으로부터는 그 누구도 결코 치유되지 못 할 것이다.
마침내 내가 나의 기획을 실현시키고자 했을 때, 그러니까 나의 머릿속에 자리한 소설을 종이에 적어 나가기 시작했을 때, 내 머릿속의 형상들은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나의 펜으로부터, 마치 어떤 감염원으로부터 출몰한 것처럼, 일종의 분비물이 내 소설의 초안을 이루는 그 조직 전체로, 그것의 모든 세포들 속으로 스며들어, 이 조직과 세포들을, 가히 말하자면 병들게 했던 것이다; 그것을 써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말하자면 행복에 대해 쓰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사진 및 세부정보 참고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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